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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 2010.11.17 13:14 조회 수 : 775



황금광 시대.


 



간송 전형필이 박물관 터를 구입한 1933년, 조선총독부 광산과에서 허가해준 금은광


개발 건수가 3,222건이었으나, 토요일과 일요일을 빼고 계산하면 하루에 열 명이상이


허가를 받아간 셈이다. 1934년에는 그 수가 두배로 증가했다. 당시 대중잡지였던 <삼천리>에


'황금광 시대'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곡괭이로 산을 파다 금맥을 발견하여


'황금왕'이 된 사람들의 성공담이 끊이지 않고 실렸다.


 


'황금광 시대'를 연 주인공은 최창학이었다.


1890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부터 금맥을 찾아 떠돌다가 더 이상


돌아다일 여력이 없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농사 대신, 다른 사람들이 금을


찾다 포기하고 떠난 고향의 뒷산에서 5년 동안 곡괭이질을 한 끝에 금맥을 발견했다.


한 해에 무려 700만 원(당시 서울의 8칸 짜리 한옥이 천 원 정도였으며, 

이것이 요즘 서울 아파트 평균 시세 3억과 비슷하다고 하면......)어치의 금이

생산되는 엄청난 금맥이었다. 1924년의 일이다.


 


최창학은 어느 소설보다 흥미진진한 인생역전을 이루며 '황금왕'으로 등극했다.


당시 조선에서 제일 좋은 승용차인 1만 8천 원짜리 뷰익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돈을 물 쓰듯 썼다.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고, 국보급 도자기로 집안을 장식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세상의 관심이 쏠렸다. 돈 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신화'가 된 것이다.


 


홀아비로 솥한 기생과 염문을 뿌리던 최창학은 1938년 1월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마흔아홉 살의 홀아비가 스물넷의 이화여전 출신 인텔리여성과 조선호텔


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그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었고, 세상은 그런 최창학을 부러워했다.


수 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금맥을 찾아 곡괭이를 메고 산으로 갔다.


 


최창학의 뒤를 이어 신화가 된 사람은 1883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난 방응모였다.


그는 젊은시절 <동아일보> 정주 지국을 맡아 운영했지만, 신문대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동아일보>에 빚을지고 지국 경영을 포기했다. 1924년, 정주를 떠나 삭주군 교동으로 가서


최창학 소유의 폐광을 불하받아 곡괭이질을 시작했다. 최창학이 포기하고 문을 닫은


곳이었기 때문인지, 파고 또 파도 금은 나오지 않았다. 동업자가 다 떠나고, 빚쟁이들이


몰려와 괴롭혔지만, 그는 계속 곡괭이질을 했다. 그러기를 3년 1926년 7월 대규모


금맥이 발견되었고, 최창학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인생역전 신화가 탄생했다.


 


금맥을 발견한 방응모는 최창학의 뷰익 리무진에는 못 미치지만, 포드승용차를 타고


정주시내를 달렸고, 아흔아홉 칸짜리 집을 지었다. 금광에서 나오는 돈으로 평안도와


함경도의 금광 몇 개를 더 구입한 후, 1932년 교동 금광을 일본인에게 기와집 1,350채


값인 135만 원을 받고 팔았다. 그리고 1933년 1월, 경영난에 처해 있던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빚쟁이 지국장에서 신문사 사주가 된 것이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인생역전 신화였다.


 


<동아일보> 지국을 하다 그만두고 금을 찾으러 다니던 방응모가 사장으로 취임하자,


<조선일보>의 일부 기자들은 금전꾼 사장 밑에서는 기자생활을 할 수 없다며 사표를


던졌다. 팔봉 김기진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둔 후 자신도 금맥을 발견해


신문사 사장이 되겠다면서 곡갱이를 들러메고 평안남도 안주로 떠났다. 그러나 김기진


은 몇 년 만에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하고 다시 글쟁이로 돌아왔다. 당시 지식인 중에서


금맥을 찾아 떠난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천리>는 1938년 11월호에 '금광신사'라는 기사를 통해 당시 금광업에 투신한 지식인


명단을 실었다. 신간회 경성지회장이자 연희전문 교수였던 조병옥, <동아일보> 편집국장


설의식, 사회주의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하던 이황,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현,


조선 노동총동맹 중앙 집행위원장이었던 정은영 등을 소개하며서, "이 밖에도 실로 다수한


인사가 있으나 이번 호에서는 여기서 그친다"고 했다.


당시의 '금광열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충렬 著. [간송 전형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