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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섬 2014.01.18 08:34 조회 수 : 374
여자 투우사 전기철

소나 돼지가 반체제 인사라도 되는 듯
날마다 땅에 파묻고 격리시키고
망명자 행세를 하는 개들이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이 바보 같은 사회에서
서정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노래방에서 밤새 일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몇 푼어치의 위안인가?
아침이면 잠이 오지 않는다며
폐가가 허물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는
누이에게 서정시란 무엇인가?

오빠, 나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지? 그런 말 하지마.
나는 종말론자야.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
영혼을 모두 돈에 팔아버렸거든 밤은 나의 대륙이고 나는 종말의 박물관이야.

나는 홀로 우체통처럼 빨개져서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시부렁대는 시계를 바라보며
서정시 같은 말을 뱉는다.
너에게 시집을 보낼게. 네 밤을 지켜줄 거야.

오빠, 시가 밥 먹여줘? 오빠도 알지. 내 꿈이 투우사라는 거.
커다란 경기장에서 카포테를 들고 서 있는 투우사 말이야. 여자 투우사!

누이는 자신의 대륙에 홀로 서서
그런데 오빠, 밤마다 야근을 하는 달은 시급이 얼마나 될까?
나 같은 년의 아픔 때문에 지구가 무거워지면 안 되는데‥‥‥. 그치, 오빠!

그 순간
투우사의 칼이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것을 보았다.

―『누이의 방』(실천문학사, 2013) 중에서